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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생충>으로 세계 영화 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긴 봉준호의 차기작은 모두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금씩 드러난 신작의 전모는, 감독이 꾸준히 도전해 온 SF 장르를 표방했기에 더욱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인기 과학소설 <미키 7 >의 각색이란 정보가 흘러나왔다. 우주 개척지를 배경으로 3D 업무를 위해 투입되는 복제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코로나19와 미국 시나리오 작가 파업 등 굵직한 홍역을 치르며 완성된 영화가 마침내 개봉에 이르렀다. 눈으로 확인한 < 미키 17 >은 국내 배경의 전작들보다는 해외 촬영 및 배우 기용으로 작업한 <설국열차>나 <옥자>와 힘 같은 반열에 있었다. 한국의 정치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진득하게 묻어난 묘사가 덜한 게 아쉽지만, 보다 보편적으로 통용할 장르 문법과 '봉테일' 특유의 '삑사리' 블랙 유머가 버무려진 스타일의 연장선에 놓인 셈이다. 과연 근미래의 지구를 벗어난 외계 행성에서 펼쳐지는 우주 활극은 작금의 세상과 어떻게 연결될까?
미키의 돈대출 일대기
▲ ?<미키 17> 스틸
오투저축은행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미키 반스'는 친구 '티모'와 함께 마카롱 가게를 열었지만 가게는 폭삭 망했고 둘은 빚더미에 올랐다. 사채업자에게 쫓겨 도망치지만, 지구에서 추격을 피할 길은 없었다. 둘은 궁여지책으로 지구를 떠나기로 한다. 마침 우주로 서브프라임모기지결과 이민을 위한 첫 개척단이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친구는 우주선 조종 기술이 있어 기술직 채용되지만, 미키는 달리 기술이 없다. 그는 앞뒤 따질 겨를 없이 마지막 남은 자리에 지원한다. '익스펜더블' 보직이다. 지구에선 금지된 것이지만, 우주 개척을 위한 예외 조항이 있었다. 바로 3D 프린팅으로 인간을 복제해 위험한 작 일본성적 업에 투입되는 역할이다. 신체와 기억 데이터를 입력해 놓고 작업 중 사망할 때마다 새로 프린트하는 것이다.
이제 '미키 1'부터 시작해 그는 거듭 죽었다가 부활한다. 우주선 밖에서 작업하다 운석에 맞고, 외 우주 적응을 위한 온갖 인체실험 부작용으로 피를 토하며 죽었다 복제될 때마다 그의 이름에 붙은 숫자는 늘어만 간다. 이젠 죽었다 되살아나는 것에 익숙해질 지경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에게 심심하면 질문하는 것처럼,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고 해도 죽음을 앞둔 심정은 절대로 평온할 수 없다. 가장 위험한 임무만 도맡은 그를 정규 보직을 가진 승무원 상당수는 천대하지만, 여자친구 '나샤' 덕분에 그런 천대도 견디며 지내왔다.
마침내 이민선은 목적지인 얼음으로 뒤덮인 겨울 행성 '니플하임'에 4년여의 항해를 마치고 안착한다. 하지만 미키의 처지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보호장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혹한의 외부 작업에 동원되는 신세다. 작업 중 사고를 당해 절벽에 추락하지만, 구조에 난항을 겪자 작업반은 미키의 장비만 수거한 채 그를 버리고 떠난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음 미키가 출력될 테니 말이다. 이제 죽음을 기다릴 뿐인 17번째 미키 앞에 행성의 토착 생물 '크리퍼'가 거대한 형체를 드러내고 덮쳐온다.
크리퍼는 미키를 잡아먹지 않고 얼음동굴 밖으로 데려간다. 간신히 기지로 돌아온 미키는 자신의 방에서 하루 일찍 프린트된 18번째 미키와 마주한다. 익스펜더블 규정에서 금지된 '멀티플'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복제해도 단일 개체만 존재할 수 있고, 이를 위배할 경우 원본까지 파기 처분하게 되어 있으니 둘 중 하나만 남겨야 한다. 들통이 나면 영영 부활할 수 없는 셈이다. 미키 17과 미키 18은 과연 이 난국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비정규직 노동자 신세
▲ ?<미키 17> 스틸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미키 17 >은 명백하게 '우화(寓話, allegory)의 형태를 취한다. '이솝 우화'로부터 유구하게 내려온 전통적 공식 아래 놓인다는 뜻이다. 인간은 물론 동식물의 입과 행위를 빌어 우리가 흔히 놓치거나 간과하는 세상의 이치와 삶의 지혜를 일깨우는 '계몽'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얼핏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져 보이는 미래의 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지만, 차근차근 뜯어보기 시작하면 매우 직설적으로 21세기의 세상을 풍자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 지점 때문에 오히려 깊고 은근한 맛이 약하다는 불평도 충분히 가능할 정도다.
미키 반스는 계약서에 서명하는 즉시 지구에서 (여전히 존재한다면) 노동법을 벗어난 존재로 전락한다. 엄연히 내용을 읽어보고 서명한 것 아니냐 반문할 수 있지만, 내용 자체가 반도체 특별법 내용처럼 '특별한 예외' 명목으로 금지된 게 태반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범죄에 악용되거나 인간 윤리를 거스르는 문제가 노출되었음에도 그 유용성 때문에 '지구 바깥'이란 예외 규정으로 교묘하게 벗어난 것이다.
그렇게 서명하는 순간부터 주인공은 2등 인간, 혹은 도구화된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로봇을 쓰는 게 더 낫지 않냐고 볼 수 있지만, 미키는 우주 이민을 위한 생체 테스트에도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존재다. 로봇은 수행할 수 없는 실험동물 역할까지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인간에게 유한한 수명과 그 결말로서의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삶을 긍정하고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촉매이기도 하다. 누구나 목숨은 하나뿐이다. 이 전제로 인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은 동등하게 존엄성을 지니는 존재로 평등하게 대해진다. 하지만 미키 시리즈를 가능케 한 3D 프린팅 기술 덕분에 이제 그 금기가 깨진 것이다. 우주선 내 이민자 중 일부는 그를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만, 다른 일부, 특히 우주 식민지의 지배층이 될 이들은 미키를 소모품으로 취급한다. 그의 목숨값은 다른 '쓸모 있는' 이들과 같지 않다. 본인 역시 그런 신세를 익히 잘 알고 그저 감내할 따름이다.
그런 미키의 고달픈 처지를 달래는 건 고위 승무원인 연인 나샤의 존재다. 우주선의 보안을 책임지는 그가 가장 미천한 신분인 미키를 선택하고 보호하는 건 그저 연애를 넘어 미키가 여전히 '인간'으로 대접받는다는 확인이기도 하다. 17번째 미키는 들키면 목숨이 날아갈 판에도 18번째 미키에게 연인을 빼앗길 수 없다는 일념으로 앞뒤 안 가리고 자신의 방으로 달려간다. 해프닝 자체로 보이겠지만, 주인공으로선 절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계급차별의 그림자
▲ ?<미키 17> 스틸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니플하임 행성 개척단은 곧 현실 세계의 극단적 축소판이다. 이들은 지구와 동일하게 외계 행성을 개척한 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계획이다. 퇴물 정치인이자 모 종교 세력의 전면적 지지를 받는 '마샬'이 이 신세계의 지도자로 약속되어 있다. 우주선 승무원의 다수는 그와 같은 종교를 맹신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마치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사처럼, 엄연히 선주민이 존재하는 외계 행성이 신에 의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명백한 운명'이라 단정한다.
지구에선 더 이상 유권자에게 선택받지 못할 처지인데도 맹목적 추종자에 둘러싸인 마샬은 우주선 내에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미키는 물론 대다수의 승무원이 제한된 자원으로 인해 늘 모자란 배급식량에 의존하지만, 마샬 부부는 지구와 다를 바 없는 만찬을 누린다. 그리고 1달에 1번 승무원을 자신들의 식사에 초대하는 이벤트를 성은을 내리듯 개최한다.
마샬 부부의 행태에서 관객은 근현대 수많은 독재자의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발견할 테다. 관객의 국적에 따라 마샬 부부는 자신이 속한 나라의 누군가를 연상할 수 있다. 루마니아 관객은 차우세스쿠 일가를, 미국 관객은 도널드 트럼프 가문을 떠올리는 식이다. 그만큼 넓은 범위를 보편적으로 포괄하지만, 그 대신에 상대적으로 얕고 옅은 맛이란 아쉬움은 덤으로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에서처럼, 종말 이후 더는 이전의 신분과 계급이 무의미한데도 이를 고수하려 집착하는 이들이 폭력과 우스꽝스러움을 교차하던 지점에서 희화화가 더 두드러지는 셈인데, 명민한 풍자를 기대한 이들은 조크가 과도하다 여길 수 있는 부분이다.
반대로 너무나 깊숙하게 현실에서 명목적 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 실질적으로 계급 차별이 심화하는 세계의 어두움에 좌절하기 쉬운 시절에 < 미키 17 >이 보여주는 '인간 찬가'는 이 영화가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함께 연민과 이해를 잃지 않는다면 가능한 변화를 믿는 태도로 그려질 수 있다. 같은 인간끼리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면, 소모적인 갈라치기를 넘어설 수 있다면, 외계 종족과 대화하는 게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오히려 마샬일파와 같은 인종차별주의자, 광신도들과 비교하면 소통 가능성이 좀 더 높지 않을까. 그런 질문이 미키의 인간 선언과 교차하며 관객에게 던져진다.
익숙한 것의 흥미로운 재조합
▲ ?<미키 17> 스틸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 영화에서 SF 고전이 제시하던 익숙한 코드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철학적 주제와 현실 풍자를 곁들인 해당 장르라면 동어반복으로 여길 지점도 제법 있다. <기생충>의 기대감으로 < 미키 17 >을 선택한다면 전작만 못하다는 실망을 보일 이가 적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감독이 도전해 온 일대기를 거시적으로 본다면, 이 또한 작가의 변곡점으로 보면 큰 무리가 없을 테다. <설국열차> 그래픽노블의 영화화 당시에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맬서스의 '인구론'을 정리한 것 아니냐는 푸념을 들었고, <옥자>의 경우도 유전자 복제와 초국적기업의 비윤리성을 편의적으로 차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적지 않게 들었던 걸 떠올리면, '작가주의' 감독이란 방패 뒤에서 답습을 거듭하는 게 아니라 한국영화에서 실행하지 못한 도전에 뛰어드는 감독의 중간 경로로 봐주는 게 더 합당한 판단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고작 봉준호의 8번째 장편을 목격했을 뿐이니 말이다. 9번째 장편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우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블랙 코미디 향연에 박장대소 낄낄 웃어대다 미키의 인간 선언에 뭉클하며 < 미키 17 >을 즐기면 될 일이다.
[작품정보]
미키 17
Mickey 17
2025｜한국/미국｜SF/판타지
2025.02.28. 개봉｜137분｜15세 관람가
감독 봉준호
주연 로버트 패틴슨
출연 나오미 애키. 토니 콜렛. 마크 러팔로, 스티븐 연 외
원작 에드워드 애슈턴 소설 《미키7》
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미키 17> 스틸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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